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3세 (문단 편집) === [[헨리 7세]]와 [[요크의 엘리자베스]]의 [[결혼]] === 국왕이 된 헨리 7세는 이미 규합한 요크 지지자들을 회유하고자 에드워드 4세의 [[딸]]인 [[요크의 엘리자베스]]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강화했다. 그러나 [[1499년]] 헨리 7세가 요크 왕가의 유일한 남계 후손 워릭 백작 에드워드(에드워드 4세의 동생 조지 플랜태저넷의 아들)를 처형하면서 요크 왕가는 단절되었다. 이미 리처드 3세의 [[외아들]] 미들헴의 에드워드는 [[1484년]] 11세로 요절했기 때문.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[[에드워드 3세]]의 4남인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, 헨리 7세는 혈통상으로는 왕가에서 멀고 멀었다.[* 요크 가문의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5남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시조이고,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4남 곤트의 존이 시조이다. 가문 구별을 위해 랭커스터니 요크니 할 뿐이지, 정작 두 세력은 자신들이 진정한 플랜태저넷이라고 주장했다.] 다만 요크 가문의 [[에드워드 4세]]의 찬탈과 [[헨리 6세]]와 그의 외아들 [[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]]가 살해당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은 완전히 멸족했기 때문에, 남아있는 랭커스터 가문의 지지자들은 [[헨리 6세]]의 이부동생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자 모계로 랭커스터 시조인 곤트의 존의 혈통을 물려받은 헨리 튜더를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로 밀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